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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 역사에서 한 . 흑 갈등의 희생양 한인. 기본권 침해 사례와 미국 인권법의 대응 방안 (3). 이윤모 ( 사회학 박사 ) 전 일리노이 인권국 연구 . 개발 . 기획 실장 시카고 한인사회연구원 회장 Info-Resourcing Consultants Diversity Solutions, Inc. Partner. 시카고 한인 문화회관 2012 년 9 월 특강. 한흑 갈등 , 집단적 차별의 주인공이 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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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차별 역사에서 한.흑 갈등의 희생양 한인 기본권 침해 사례와 미국 인권법의 대응 방안 (3) 이윤모 (사회학 박사) 전 일리노이 인권국 연구.개발.기획 실장 시카고 한인사회연구원 회장 Info-Resourcing Consultants Diversity Solutions, Inc. Partner 시카고 한인 문화회관 2012년 9월 특강
한흑 갈등, 집단적 차별의 주인공이 한인? • 1955년 흑인 저항의 시작과 1964년 민권법, 1965년 개정 이민법의 상관관계 (노동 시장의 부분적 공백, 인종갈등의 완충지대 필요, 냉전 시대 제3 세계에서의 미국의 도덕적 이미지 문제) • 동반구 이민 개방 20년만인 1984년 뉴욕서 한흑 갈등 시작 (한인의 흑인 지역 상권 계승 후유증). • 1990년대 초 (이민 개방 25년만에) 한흑 상인과 고객의 충돌이 두 인종-민족간의 갈등으로 과잉 포장됨. (정치는 미디어를 교묘히 활용하여 한인들이 흑인들의 불만을 홉수하는 표적이되고 흑백 갈등에서 백인들의 방파제로 한인이 가해자를 대리하게 됨. • 뉴욕의 레드 애플 청과상, 시카고 로즈랜드 보이콧, L.A. 4-29 폭동으로 분화구 발견후에 잠정 안정. 한인은 한흑 갈등의 주역 이미지를 안게 됨.
뉴욕시 레드 애플 청과상 보이콧 • 1990년 1월 18일 뉴욕청과상 (Family Red Apple ,장봉재씨 소유)에서 카리비안계 흑인 Ms. Felissaint가 $2-$3 짜리 cassavas (열대 녹말가루) 가격을 깎으려 흥정하다가 거절하는 여점원을 욕했다. 말다툼 중에 장씨가 밀쳐서 흑인 여자가 바닥에 쓰러지고 부상했다고 주장한 데서 보이콧 발단. • 미디어의 보도로 보이콧은 확대되어 전국적인 잇슈화되다. 그해 8월 27일에도 보이콧은 멈추지 않아 뉴욕 딘킨스 시장은 시위 확대 방지 대책회의를 했다. (뉴욕 타임스 : 8. 28, 1990) Mainstream media coverage of the Red Apple Boycott criminalized the conflict, thereby obscuring its political dimensions. While a few journalists attributed the boycott to such innocuous causes as “cultural” differences or the language barrier, the vast majority depicted it as scapegoating—the irrational venting of frustrations upon an innocent group. Portraying Korean-American merchants as a “model minority.” .
“한인 민권문제”단어로 미디어 중립화 • 1990년 6월 30일 시카고 로즈랜드 (11300’s S. Michigan Ave.)에서 시의원 Robert Shaw와 그의 동생인 Bill Shaw 주하원의원이 한인 업소 보이콧 전단을 뿌리고 시위를 선동했다. 9개 조항 요구사항을 선포
L.A.4-29 폭동 전후 한인사회의 대응 • 1992년 4월 29일 발생하여, 6일 동안 지속된 미국 대도시 폭동으로 역사상 최고, 피해액 10억불 중 4억불이 한인의 손실. • 1992 L.A. Rodney King Verdict Aftermath: Death 53; Injured 2,400; Arrested 12,00; Loss $1 Billion. • According to a Los Angeles Times survey conducted eleven months after the riots, almost 40% of Korean-Americans said they were thinking of leaving Los Angeles.[
Anger over Korean American shop-owner Soon JaDu's weak sentence for fatally shooting a black teenager Latasha Harlins was pointed to as a potential reason for the riots, particularly for aggression toward Korean Americans.
After the riots, between 1992 and 2007, the city's black population dropped by 123,000, as households left for the Inland Empire, close-in suburbs and even for family hometowns in the Deep South. They were running, and being pushed: The city's Latino population grew by more than 450,000 in those years. In the Los Angeles area, unemployment for Latinos and blacks is worse than in 1992. In 2010, 13.4 percent of Latinos and 19.5 percent of African-Americans were without work. It's clear in 2012 that some communities Soqui photographed in 1992 have turned a corner, including Korea town, Pico-Union and Hollywood. Meanwhile, South Los Angeles and others have not. Much as the riots drove out commerce and jobs, the ongoing recession has shuttered storefronts in poor and working-class neighborhoods. "Not only have these large structural issues never been fixed in Los Angeles," says Darnell Hunt, director of the Ralph J. Bunche Center for African-American Studies at UCLA, but "you could make the case things have gotten worse."
폭동이 발생한지 20년… ‘잊혀진 4.29’는 여전히 우리 앞에 초라한 모습이다. 엄청난 피해는 망각에 묻혔고 한인사회는 4.29를 기억하는데 인색하다. 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 내부에서는 “우리도 미국 주류층에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인식이 불 붙었지만 지난 세월 흐지부지되었다. 모금한 1천만 달러의 거액의 피해 성금을 둘러싼 진실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채다. 폭동으로 인한 한인사회의 피해보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더 중요한 것은 폭동 당시 왜 한인사회가 미 정부나 언론 등 제도권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흑 갈등의 주모자로 인식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인사회는 4.29폭동으로 당한 고통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미 정부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것이 4.29폭동에 대한 우리 한인사회의 지상 과제다. 두순자를 코리안이라고 미디어가 계속 몰아부친 저의를 파악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한인 전체를 차별자로 범주화하는 미디어와 대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인사회가 한흑 갈등의 원흉이며 폭동의 주원인라는 누명을 썼는데 벗어나지 못하고 폭동의 주 타겟이 됐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민권 강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