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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민족정신

한국사와 민족정신. 고려시대 이민족의 침입과 한국인의 저항정신. 강원대학교 사학과 ( 인문대학 3 호관 ) 한성주 (http://hsj0714.egloos.com/ hsj0714@hanmail.net). 1. 고려 - 거란 전쟁. 고려 초 동아시아의 정세. 중국 : 당 ( 唐 ) 멸망 후 혼란이 계속됨 - 5 대 10 국시대 (907~960) : 중국 북부의 중심 지역에서는 다섯 왕조가 교체되고 주변지역에서는 열 나라가 흥망을 거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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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와 민족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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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사와 민족정신 고려시대 이민족의 침입과 한국인의 저항정신 강원대학교 사학과(인문대학 3호관) 한성주(http://hsj0714.egloos.com/ hsj0714@hanmail.net)

  2. 1. 고려-거란 전쟁 고려 초 동아시아의 정세 • 중국 : 당(唐) 멸망 후 혼란이 계속됨 • - 5대10국시대(907~960) : 중국 북부의 중심 지역에서는 다섯 왕조가 • 교체되고 주변지역에서는 열 나라가 흥망을 거듭함 • - 960년에 송(宋)나라가 다시 통일을 이룸 • 거란 : 당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족이 만주에서 세력 성장 • - 916년 족장 야율아보기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중국 북부지역 • 으로 세력을 확대,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킴 • - 947년에는 나라 이름을 요(遼)라고 함

  3. 1. 고려-거란 전쟁 고려 초 동아시아의 정세 • 고려 : 고구려를 계승, 936년 후삼국 통일 • - 태조 왕건 : 많은 호족들과 연합하여 통일을 이룩 • - 광종 :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 과거제 실시, 통치체제 정비, • 독자적 연호 사용(광덕光德, 준풍 峻豊), 황제를 칭하고, 개경을 • 황도(皇都)라고 함, 군사력을 강화하고 주변의 여러 나라와 • 외교관계를 맺고 교역을 활발히 함 • 고려, 거란, 송의 관계 • - 고려는 거란과 충돌을 피하고 평화관계를 유지하려 함 • - 그러나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위를 강화하고 변경지대에 • 성(城)을 쌓고 군사 30만으로 광군(光軍)을 조직 • - 송(宋)은 고려와 국교를 맺어 요(遼)를 함께 견제하고자 함, 송은 한때 • 거란을 치려고 고려에 출병을 요청, 고려는 형식적으로 군대를 • 출동시켜 송과 관계를 유지

  4. 1. 고려-거란 전쟁 거란의 침입과 서희의 담판 • 거란의 제1차 침입 : 993년(고려 성종 12년) • - 거란은 송을 침략하기 전에 후방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고려를 침략 • - 소손녕,80만(?), 봉산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짐, 청천강 하류 • 안융진에서 고려가 거란군을 크게 무찌름 • - 거란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 회담을 제의 • 서희(徐熙)의 담판 • -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움 • - 고려는 송과 관계를 끊고 요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화 • - 거란은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땅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 • - 고려는 거란이 물러가자 비공식적으로 송과 계속 교류하고 • 강동 6주를 군사거점으로 삼고 거란의 재침략에 대비

  5. 1. 고려-거란 전쟁 거란의 2차 침입 • 거란의 제2차 침입 : 1010년(고려 현종 1년) • - 거란은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세운 것을 구실로 침입 • - 성종은 강조의 죄를 다스리겠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 -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거센 저항에 부딪힘, 흥화진의 • 군인과 백성들은 양규(楊規)를 중심으로 뭉쳐 결사 저항 • - 거란군은 결국 20만의군사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개경으로 진군하여 • 강조를 사로잡음, 현종은 나주까지 피신 • 고려의 저항 • - 거란군은 결국 흥화진을 함락할 수 없었음(이후에도 마찬가지) • - 고려군은 검차(檢車)를 개발하여 거란 기병을 공격 • - 청야(靑野)작전을 구사, 곡식을 태우고 견고한 성을 중심으로 맞섬 • - 거란군은 개경을 함락하였지만 현종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 고려군이 서경이북 곳곳에 버티고 있어 식량 보급이 끊기고 포위 • 당할 위기에 빠졌기 때문에 회군할 수 밖에 없었음

  6. 1. 고려-거란 전쟁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 거란의 제3차 침입 : 1018년(고려 현종 9년) • - 거란은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하고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 • - 고려가 응답하지 않자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침입 • 강감찬의 귀주대첩 • - 고려는 강감찬을 지휘관으로 하여 20만 군대를 편성 • -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 곳곳에 군사를 배치하여 대비 • - 거란군은 고려군에 계속 패배함, 무리하게 개경까지 들어왔다가 •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식량이 떨어져 산길을 타고 도주 • - 강감찬은 물러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완전히 포위하여 몰살시킴, •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명에 불과

  7. 1. 고려-거란 전쟁 승전의 원인과 전쟁의 영향 • 승전의 원인 • - 고구려 계승의식과 고토 수복에 대한 의지 • - 외세의 침입에 대한 대비(광군 30만) • - 정신적 단결(민족혼 民族魂), 관(官)과 민(民)의 힘 등 • 전쟁의 영향 • - 고려의 국제적 위상 강화 : 여진족이 조공을 바치고 고려를 부모의 • 나라로 섬김, 송(宋)은‘전연의 맹약’으로 거란에게 매년 세폐를 • 바치고 땅을 떼어주던 상황에서 고려가 거란을 물리치자 고려를 우대 • - 거란은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 감, • 이것은 결국 여진이 성장하여 금(金)을 건국하게 되는 배경이 되고 • 거란은 금에 의해 멸망당함

  8.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여진 해적과 고려 수군 • 되놈, 떼놈 =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 • 되-뒤 = 북쪽, 북쪽사람을 가리킴 • 된바람 = 북풍(뒤쪽 바람) • 여진 해적 • - 발해 멸망 후 여진족은 압록강과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음 • - 고려는 서여진과 동여진으로 나눠서 부름, 일부는 고려에 복속함 • - 동여진은 배를 이용하여 고려의 연안을 자주 침략함, 특히 동해안 • 일대(지금의 원산, 강릉, 경주, 부산 및 울릉도) 등이자주 피해를 입음 • - 심지어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의 대마도, 구주 일대를 침략하기도 함 • 동여진의 일본 침략은‘도이의 적(刀伊の敵)’으로 불림, • 일본사에서는 아주 저명한 사건 중 하나 筑前國 怡土郡에 습격해 와서, 志摩,早良등의 郡을 지나서, 인물을 탈취, 민가를 태웠다. 그 賊徒의 배는, 혹은 길이 12尋(약 1.8m) 혹은 8~9尋, 한 배의 노는 3, 40 정도, 배에 탄 사람은 5~60인 또는 2~30인, 1~20무리는 산에 올라 들을 없애고, 말과 소를 죽여 먹고, 또 개고기를 잡아 먹는다. 늙은이와 兒童은 모두 다 斬殺당하고, 男女의 젊은 자를 잡아 배에 실은 것이 4~500인이었다.

  9.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여진 해적과 고려 수군 • 고려의 대응 • - 1단계 : 동해안 부근 요해처 수십 곳에 성을 쌓음 • - 2단계 : 수군을 본격적으로 배치하고 관할 부서인 진명도부서(鎭溟都 • 部署 지금의 원산)을 두어 해적을 방어하게 함 • 고려 수군 • - 1019년(고려 현종 10년) 여진 해적이 동해안을 거쳐 일본의 대마도, • 구주 지역을 약탈한 뒤 돌아가다가 고려 수군의 공격을 받음 • - 고려 수군은 일본인 포로들을 빼앗어 일본으로 돌려보냄 • 진명 선병도부서(鎭溟 船兵都部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 8척을 • 포획하였다. 도적들이 노략한 일본(日本) 포로 남녀(男女)2백 59명 • 을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보내 그 나라로 압송하다.

  10.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여진 해적과 고려 수군 • 고려 수군 • - 배 안을 보면 통상의 배보다 훨씬 광대했다. 선체는 이중이 되어 있 • 어, 선상에는 노가 좌우에 4개씩 설치되어 있다. 노 젓는 水夫는 5~6 • 인, 병사는 20명 남짓 타고 있다. 또 한 척은 노가 좌우 7~8개씩이고 • 뱃머리에 철의 뿔을 달고 있다. 이것은 적선에 돌격해 파괴하기 위한 • 것이다. 배 안에는 다양한 무기가 마련되어 있다. 갑옷, 갑주, 대소의 • 칼, 갈퀴 등이다. 병사가 이것들을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 화약 • 으로 돌을 날려서적선을 쳐서 파괴한다.

  11.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고려장성 – 천리장성의 수축 • 고려 초기부터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다가, • 1033년(덕종 2)에야 유소(柳韶)에게 성을 쌓토록 함. 유소는 요의 침입을 • 막은 전공이 있는데, 이때 옛 석성(石城)을 수리하고 위원진(威遠鎭)·정 • 융진(定戎鎭)을 두어 국방을 튼튼히 함, 유소는 이러한 성을 바탕으로 축 • 성 계획을 세우고, 산재해 있던 성을 연결하고 새로 축조하거나 보강하여 • 11년이 지난 1044(고려 정종 10)년에 완성

  12.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 여진의 성장 • - 여진족은 발해 멸망 후거란족이 세운 요(遼)의 지배를 받음(10세기 초) • - 고려-거란 전쟁 후 거란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부족들을 통합 • - 지금의 하얼빈 부근에 있는 완안부 (完顔部)가 세력을 키움 • - 고려에 복속된 여진족 및 부락들을 공격 : 고려의 동북 변경지대를 위협 - 여진인들 가운데에는 고려에 의탁하는 향화인(向化人)이 많았고, 심지어는 고려로 이주하는 투화인(投化人, 귀화인)도 적지 않았음 - 고려에서는 이들을 장성 내외에 거주케하여 변방의 울타리로 삼음 - 1104년(숙종 9) 여진 세력은 고려에 투화해 오던 여진인들을 추격하 여 정주(定州)의 장성(長城) 부근까지 진출함 ⇒고려에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고 적극적인 대처를 모색하게 됨

  13.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 금나라 시조 아골타의 시조는 신라인 함보 (函普) • -“금시조의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금사본기 제 • 1권, 세기) - 금나라 정사 •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 • 다”[금사] -“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 • 는 중국말 왕과 같다”[송막기문]- 금 건 • 국시 송나라에서 쓰여진 시 • -“일찍이 여진의 선조가 대방(고려)로부터 • 나왔으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 • 고 … ” (고려사 예종 4년] [금사] [송막기문]

  14.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 고려의 대응과 별무반 편성 • - 숙종은 임간과 윤관을 대장으로 삼아 두 번 군대를 보냄 • ⇒ 기병 위주의 여진족에게 모두 패함 • - 별무반(別武班) 편성 : 윤관의 건의, 여진에 대응하기 위한 기병부대 중심 •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병(僧兵)으로 구성된 • 항마군(降魔軍), 그리고 경궁(梗弓)·정노(精弩)·발화군(發火軍) 등의 • 특수군으로 구성됨 • - 신기군은 문무 산관(文武散官)과 서리(胥吏)에서부터 상인(商人)· • 노비(奴婢)·양인 농민[白丁]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들로 조직, • 이들 가운데 말을 갖지 못한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 아닌 사람은 모두 특수병과 신보군으로 편제 • - 한편 별무반의 설치와 여진 정벌의 이면에는 당시 비대할 대로 • 비대해진 문벌귀족(門閥貴族)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예종과 윤관의 • 의도도 숨어 있었다고도 함

  15.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 여진 정벌과 동북 9성의 축조 • - 별무반이 여진 정벌에 나선 것은 1107년(예종 2) 12월 • - 윤관을 원수(元帥),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는 17만의  별무반은 • 정주관(定州關=定平)을 떠나 기습작전으로 여진족을 소탕하고 • 갈라전(曷懶甸) 일대를 점령하고는 이곳에 9성(九城)을 축조 • - 9성의 명칭 : 영주, 복주, 길주, 웅주, 함주, 의주, 공험진, 평융진, 통태진 • - 두만강 북쪽 7백리의 선춘령에‘고려지경(高麗地境)’의 비석을 세움 • ⇒고려는 9성의 축조로 광활한 영토를 획득 • - 1108년(예종 3) 4월에 윤관 등은 일단 개경으로 개선 • - 고려는 이곳을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약 7만호를 이주시킴 • 그러나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이주민들은 새로운 지역에 쉽게 정착하지 • 못하였고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정착을 포기

  16. 2. 여진의 침략과 고려의 대응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 9성의 환부와 금(金)의 건국 • - 그러나 여진족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곧바로 조직적인 무력 항쟁을 전개 • 전세가 고려에 불리하게 되자, 윤관과 오연총 등은 다시 출정하기도 함 • - 여진 쪽에서 9성의 환부를 조건으로 화친을 요구 • - 9성의 환부 • 고려로서도 오랫동안의 전쟁 준비로 막대한 물자와 인명 피해의 부담 • 개경과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뿐만 아니라 지형 조건상 지키기도 • 어렵다고 판단, 마침내 1109년(예종 4) 7월에 9성의 환부를 결정하고 •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주둔했던 군사와 백성들을 철수 • -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은 더욱 강성해짐 1115년 만주 전역을 장악 • 국호를 금(金)이라고 칭함, 1125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킴 • - 고려에게 거꾸로 군신관계를 요구, 고려는 결국 금의 요구를 수용

  17. 3.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몽고의 침략 • 몽고의 성장과 고려 침입 • - 13세기 초 테무친이 여러 부족을 통합, 1206년 징기즈칸으로 추대됨 • - 정복사업에 나서 영토를 확대, 대제국을 형성해 감 • - 빠른 기병과 뛰어난 궁술, 잔인한 뒤처리로 순식간에 금나라를 멸망시 • 키고 1231년부터 7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 • - 고려에 해마다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던 중 1225년 몽고 •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에서 피살된 것을 계기로 침입 시작 • - 1231년(고종 18) 몽고의 살리타이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 순식간에 의주, 철령성을 함락시키고 귀주성으로 진격 • - 귀주성에서는 장군 박서와 김경손이 한달 이상 이들의 침입을 격퇴 • - 결국 살리타이는 귀주성을 그대로 두고 남쪽으로 내려와 개경을 포위 • 청주, 충주를 향하여 계속 진격함 • - 고려에서는 해마다 많은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요청 • 몽고군은 서북면의 40여 개 성(城)에 72명의 다루가치를 설치한 뒤 철수

  18. 3.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강화 천도와 대몽 항전 • 강화 천도와 몽고군의 재침입 • - 화의 뒤 몽고군은 막대한 양의 공물과 인질, 군대까지 보낼 것을 요구 • 개경에도 감찰관인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국정을 간섭하려 함 • - 고려는 항전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김 • 강화도는 앞바다 물살이 거세어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몽고군이 쉽게 •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고, 남부지방의 곡식과 물자를 들여올 수 있음 • - 1232년 몽고군은 개경 환도를 요구하면서 2차 침입 • 경상도까지 내려가 약탈을 자행, 대구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불타버림 • - 몽골군 주력부대가 처인성(용인)에서 크게 패하고 승려 김윤후가 쏜 • 화살에 적장 살리타이가 사살됨으로써 몽고군은 철수 • - 몽고는 금을 멸망시키고 남송을 공격하면서 1235년부터 다시 침략 • 고려는 각지의 산성에 관원을 파견하여 대비하면서 불교신앙으로 • 몽고군을 물리치고자 대장경 조판사업을 벌임 • - 1270년에까지 전쟁이 계속됨, 1271년 몽고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꿈

  19. 3.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삼별초의 항전 • 삼별초(三別抄)의 항전과 의미 • - 원래 치안유지를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시작, 좌·우별초와 몽골에 • 잡혀갔다가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진 신의군의 삼별초로 확대 • -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와 화의를 맺어 개경으로 환도하자 • 삼별초는 배중손, 노영희 등을 중심으로 강화도에서 끝까지 항전 • - 삼별초는 1천척의 배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전라도와 제주도 여러 • 고을을 장악하여서남해안 일대에 세력을 형성함 • - 개성으로 올라가는 막대한 곡물과 재물이 담긴 조운선을 공격, • 삼별초는 일본에게 몽고와 싸울 것을 제안하기도 함 • - 1271년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은 진도를 기습, 삼별초는 막대한 피해를 • 입고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을 계속 • - 1273년 원과 고려의 연합군은 160척의 전함에 1만여 명의 병력을 • 동원하여 제주도를 공격, 3년 동안의 삼별초의 항쟁이 끝남 • - 삼별초는 민족정신, 자주정신,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칭송됨

  20. 3.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원 간섭기의 고려 •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 - 몽고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선박, 식량, 무기는 물론 고려군을 동원 • - 1차 원정 : 2만 5천명, 전함 900여 척을 동원, 초반에 승전을 거두었으나 • 태풍에 의해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고 실패 • - 2차 원정 :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 중국 강남에서 • 10만 대군, 고려 및 몽고군 4만명, 병선 약 4천척 동원 • 태풍 때문에 또다시 실패, [일본 카미가제(신풍, 神風)] • - 이 과정에서 고려는 많은 함선을 잃어 해군력이 급격히 약화됨 • ⇒고려가 왜구의 침략에 혹독하게 시달리는 원인이 됨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

  21. 3.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원 간섭기의 고려 • 공민왕의 영토 수복 • - 1350년대 중국에서 원 황실의 내분과 한족들의 반란이 일어남 • - 1351년 공민왕 즉위,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 함(반원 정책) • 정동행성 폐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 • 요동 정벌 • - 1370년(공민왕 19)에는 이성계와 지용수를 보내 요양에 있는 동녕부를 • 공격해 함락함, 그 지역에 살던 고려 인민들을 대거 본국으로 귀환시킴 • - 공민왕의 요동 공격은 영토 획득보다는 원명교체기 원과 명을 동시에 • 견제하면서 고려의 자존의식을 드높였다는데 의미가 있음

  22. 4. 홍건적과 왜구 홍건적의 침입 • 홍건적(紅巾賊) • -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를 믿는 종교집단으로 한족(漢族) 농민반란군 • - 이들 중 일부가 요동을 점령하였으나, 원(元)의 반격을 피해 고려를 침범 • 홍건적의 고려 침입과 격퇴 • -1359년 홍건적은 4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 서경(평양)까지 점령 • ⇒ 안우, 김득배, 이방실, 이승경 등이 격퇴하여 궤멸시킴 • - 1361년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공격하여 개경까지 함락시킴 • ⇒공민왕은 안동 피난, 정세윤,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등이 물리침 • ⇒이때 동북면 출신 이성계가 휘하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선봉장이 되어 • 처음 두각을 나타냄

  23. 4. 홍건적과 왜구 왜구의 침입 • 일본의 정세 • :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후 → 가마쿠라막부 붕괴 → 남북조시대 → 무로마치 막부 • 왜구(倭寇) • - 대마도 등지에 근거를 둔 일본 해적, 고려 및 중국 해안을 노략질 함 • - 일본 중앙정부의 힘과 고려의 해군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 주로 조운선 • (漕運船)과 조창(漕倉)을 공격, 곡식 만이 아니라 인민을 노략, 살상함 『왜구도권(倭寇圖卷)』

  24. 4. 홍건적과 왜구 • 왜구의 침입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짐 • :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 정벌과 조선의 왜인통교정책으로 인해 점차 평화적통교자로 전환되어 감 왜구의 침입 • 왜구의 고려 침입과 격퇴 • -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충정왕 2년)부터 • - 침입 지역은 주로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에 집중, 개경 앞에도 출몰, •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에도 이름, 동해안 쪽으로는 함경까지 나타남 • - 홍산대첩 : 1376년(우왕 2) 최영(崔瑩)이 충청도 홍산에서 금강 연안의 •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왜구를 격퇴 • - 진포대첩 : 1380년 최무선(崔茂宣)은 화통도감을 설치, 화포를 만든 후 • 나세(羅世)와 함께 진포(금강 입구)에서 왜선 5백척을 불태움 • - 황산대첩 : 이때 상륙하여 남부 지역을 횡행한 왜구를 이성계(李成桂)가 • 변안열(邊安烈)과 황산에서 크게 무찌름(이지란, 아기발도) • - 1383년(우왕 9) 정지(鄭地)가 남해 관음포에서 큰 전과를 올린 것을 비롯 • 1389년(창왕 원년) 박위(朴葳)가 전함 1백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 대마도를 토벌하면서 왜구의 침입이 조금 감소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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