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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성 수련 3. 가르멜 영성 안에서 본 외로움. 집착 없이 - 법정 -. 미워한다고 괴롭히지 말며 , 좋아한다고 너무 집착하지 말라 .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증오와 원망이 생기나니 사랑과 미움을 다 놓아버리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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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영성 수련 3 가르멜 영성 안에서 본 외로움
집착 없이- 법정 - 미워한다고 괴롭히지 말며, 좋아한다고 너무 집착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증오와 원망이 생기나니 사랑과 미움을 다 놓아버리고 가라.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병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 데서 오며,죽음 또한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 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연 따라 마음을 일으키고,인연 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이것이 인연은 받아들이고 집착은 놓는 걸림 없는 삶이다. 사랑도 미움도 놓아버리고 가는 수행자의 길이다.
가르멜 영성 안에서 본 외로움 • 가르멜 영성은 먼저 하느님이 중심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시각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간을 본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당신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은 이승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모토로 한다. • 십자가 성 요한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가장 방해되는 요소를 이렇게 말했다. 절대 버릴 마음이 없는 집착(애착)으로 사람, 옷, 책, 기타의 것에 딱 붙어 있는 것이다. 또 음식이나 쓸데없는 대화에서 만족을 찾고, 불필요한 것들을 알고 듣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가르멜 산길 1권] 11, 4 참조). • 십자가 성 요한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우리를 모두 '하느님과의 합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1. 가르멜 영성 안에서 떠남의 의미 • 떠남은 어떤 대상 혹은 어느 무엇을 향해 가는 움직임이다. 내면 여행은 떠남에서 시작한다. 지금 있는 장소나 사람,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떠나는 것이므로 흔히 '이탈'이라 표현한다. 이러한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탈)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밤'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욕망에 대한 벗음(비움)을 통해 사물에 대한 욕구와 맛을 끊어버렸기에 마음은 자유롭고 텅 빈다. 하느님께서는 그 텅 비고 자유롭고 걸림 없는 조촐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신다. 여기서 말하는 떠남, 비움, 이탈은 다 같은 의미로 쓰이고, 이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것이다.
피조물에 애념과 애집을 가질 때 마음은 그 피조물과 같아지고, 애집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혼이 피조물과 비슷해진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와 사랑 받는 이를 서로 닮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집착을 깨끗이 씻어버리기 전에는. 이승에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영혼의 순수한 변성을 얻지 못하고 저승에서도 맑은 직관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친다([가르멜 산길 1권] 4장 참조).
"하느님 아닌 무엇에 정이 쏠려서 그 욕망이 영혼 안에 자리를 차지하면 할수록 하느님을 위한 수용력은 그만치 줄어든다"([가르멜 산길 1권] 6, 1). 앞서 말한 대로 한 주체에 상반되는 둘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성 요한이 욕망을 벗고 비운 몸이 되라는 것은 최상선이신 하느님 한 분만으로 자신을 가득 채워 영혼을 가멸게 하기 위함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받은 최종 목적(지복직관)을 전제로 하지 않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읽는다면 대단한 모순이고 인간성의 파괴로 들린다.
2. 떠남은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한 것 • 하느님과의 합일에 들려면 영혼 안에 사는 모든 것, 적거나 많거나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든 것(욕망)이 죽어야 하고, 영혼은 그 일체에(하느님 아닌 것에) 욕이 없어야 하며, 일체가 그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가 일체를 위한 것도 아니도록 그만치 이탈해야 한다([가르멜 산길 1권] 11장 참조). • 피조물에 정을 붙이고 에너지를 쏟을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 사랑은 평등과 유사를 만들기 때문이다. 저 먼 거리를 체험한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불쌍한 이 몸, 이 내 흠과 모자람이 언제나 당신의 옳으심에 맞아지오리까? 당신은 진실로 좋으신 분 나는 몹쓸 놈, 당신은 자비하시고 나는 매정하고, 당신은 거룩하시고 나는 처참하고, 당신은 의로우시고 나는 불의하고, 빛이신 당신 소경인 나, 생명이신 당신 죽음인 나, 당신은 약 나는 병자, 당신은 절대 진리 나는 공허...."이렇듯이 피조물에 집착한 영혼이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자연과 초자연의 모든 것에 대한 욕심을 먼저 비우지 않고 하느님과 합일되는 높은 단계에 오르려는 생각은 무지의 절정이다([가르멜 산길 1권] 5 장 참조).
애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기준점으로 다음을 제시했다. "감성에 오는 어떠한 맛이든 순수한 하느님의 존영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를 끊고 빈 몸이 되어야 한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온갖 물욕에 맛이 없음을 '밤'이라 불렀다. 영혼이 온갖 물욕에서 맛을 끊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 있고 비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욕구가 극복되면, 영혼은 그런 모든 것에서 미끼를 맛보지 못하므로, 그 욕구에 대해 어둡고 빈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가르멜 산길1권] 3, 1 참조).
영혼의 힘이란 감각의 힘이 없어야 더욱 세어지기에 감성 쪽의 낙을 누리기보다 도리어 그 낙과 욕구를 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성생활에서 영혼을 구출하기 위해 정화의 습성을 지니려면, 마음의 첫 움직임에서 곧장 하느님을 향하기 전까지 그 재미와 낙을 끊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영성인은 아름다움과 뛰어난 천품이 모두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을 깨달아 그 헛된 즐김에서 의지를 깨끗이 하고 어둡게 해야 한다.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착한 선행에서 오는 기쁨까지 우리에게 비우고 벗으라고 가르친다. 덕의 습성과 자비의 행위, 하느님 법의 준수와 착한 성질 때문에 기뻐해야 하겠지만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과 닦은 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데만 오직 기쁨을 두어야 한다.
생명의 길은 곧 사랑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과연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하느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가치가 있을까? 사랑이란 모든 것에서 기쁨을 씻어버리고 오직 하나,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데에 마음을 둘 만큼 총명하고 굳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가르멜 산길 3권] 30장 참조). •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에 집착하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또 이 모든 것을 통해 실없는 기쁨에 빠지지 않고서 하느님 한 분께 우리의 온 애정과 마음을 집중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선물이 하느님 자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이끄는 나침반은 '하느님의 영광과 존영에 대한 것만 의지가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은 복음적 완덕을 따라 하느님을 섬기는 것([가르멜 산길 3권] 17, 2 참조)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계획(지복직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3. 가르멜영성에서 외로움이 갖는 위치 • 집착과 사욕 없이 사물(창조물)을 대할 때 그 사물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하고 맛볼 수 있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욕심(집착)을 정화하시기 위해 섭리라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무질서한 집착을 바로잡아 가신다. • 자기 심연을 보게 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더 깊은 심연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동시에 그 심연의 깊이만큼(외로움, 허전함, 고독) 당신 자신으로 채워주신다. • 일반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섭리를 통해 빈 자리(외로움)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 빈 자리(외로움)에서 사랑의 변용이 일어남을 안다면 모두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마음의 빈 공간인 외로움은 기도와 수련을 통해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바뀌어 간다. 외로움이 현재 가지지 않은 그 무엇 때문에 마음이 비워진 것이라면, 그리움과 기다림은 나를 채울 어떤 대상을 고대하며 바라는 것이기에 망덕으로승화해 간다. 망덕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등대이고, 망덕의 꽃이 참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안에 깊이 숨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열망하는데 외로움은 내면여행을 하는 우리를 지름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외로움이 클수록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섭리로 다가오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서 외로움의 배를 타고 그대로 몸을 맡기면, 그 배는 외로움이 솟는 근원까지 우리를 실어다 주고 그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과의 합일(관상)을 이루게 된다.
외로움이 기도와 시간을 통해 조촐해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변화해 감을 아는 것은 거대한 광석을 찾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나는 은혜를 받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영혼의 순결이라고 대답한다. 이 순결이란 피조물과 덧없는 것에 아무런 애착이 없고 그에 정신이 쏠리지 않음에 있다."([가르멜 산길 3권] 3, 4). •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당하거나 역경에 처했을 때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일체의 번영을 초월하는 최상선도 잃지 말라고 가르친다. • "최상선이란 순경에나 역경에나 한결같은 마음의 고요와 평화인 것이다” ([가르멜 산길 3권] 6, 4). 마음의 고요와 순결이 인간의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으로인도해 주기에 최상선이라 한 것이다. 외로움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을 관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에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