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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감은사지 사적 제 31 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 陽北面 ) 용당리 ( 龍堂里 ) 에 있는 신라 때의 감은사 절터 . 《 삼국유사 》 에 따르면 ,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 년 ( 신문왕 2) 에 완공하였다 . 《 삼국사기 》 에 있는 바와 같이 , 이 절의 금당 ( 金堂 ) 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 절터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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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감은사지 사적 제 31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용당리(龍堂里)에 있는 신라 때의 감은사 절터.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金堂)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 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 남으로 흐르는 대종천(大鐘川)을 앞에 두고 서 있다.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112호 2중의 기단에 사각형으로 쌓아올린 3층 석탑으로, 동·서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이다. 2중기단 중의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面石)을 같 은 돌로 만들었으며, 모두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졌고, 상층기단은 면 석을 12장으로 만들었다. 갑석(甲石)은 하층이 12장, 상층이 8장이며, 탱주(撑柱)는 하층에 3개, 상층에 2개를 세웠다.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1960년에 서쪽 탑 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둔 사리장치가 발견 되었다.
005 1973년에 발굴되었는데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 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 장니(天馬圖障泥)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 분도 우수하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 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 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 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국보 188호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금관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 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금관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높이 32.5㎝의 전형적인 신라 금관으로 묻힌 사 람이 쓴 채로 발견되었다. 머리 위에 두르는 넓은 띠 앞면 위에는 山자형 모양이 3줄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이 2줄로 있는 형태이다. 山자형은 4단을 이루며 끝은 모두 꽃봉오리 모양으로 되어있다. 금관 전체에는 원형 금판과 굽은 옥을 달아 장식하였고, 금실을 꼬아 늘어뜨리고 금판 장식을 촘촘히 연결 하기도 하였다.밑으로는 나뭇잎 모양의 늘어진 드리개(수식) 2가닥이 달려있다.
005 국보 189호 금모(金帽)란 금으로 만든 관(冠)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높이 16㎝, 너비 19㎝ 인 이 금모는 널<관(棺)> 바깥 머리쪽에 있던 껴묻거리(부장품) 구덩이와 널 사이에 서 발견되었다.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위에는 반원형이며 밑으로 내려 갈수록 넓어진다. 아랫단은 활처럼 휘어진 모양으로 양끝이 쳐진 상태이다. 윗단에 눈썹 모양의 곡선을 촘촘히 뚫어 장식하고 사이사이 작고 둥근 구멍을 뚫었 으며, 남은 부분에 점을 찍어 금관 2장을 맞붙인 다음 굵은 테를 돌렸다. 그 밑에는 구름 무늬를 뚫어 장식하였고 또 다른 판에는 T자형과 작은 구멍이 나 있 는 모양의 금판이 있다. <천마도〉는 말이 진흙길을 달려 갈 때 말 탄 사람의 발에 진흙이 튀지 않도록 말 의 배 부분에 대는 장니(障泥)라는 말 장식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장니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으며, 채색을 써서 그림을 그렸다. 장니를 사용한 말이 천마처럼 잘 달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달리다 못해 하늘을 날아가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신라시대 회화 작품으로 몇 안되는 귀중한 예이며, 천마총(天馬塚)이라는 이름은 이 〈천마도〉의 발견으로 인해 경주 황남동 155호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천마 그림은 이후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장례와 관련된 곳이 많다. 이는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실어 나른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이 담긴 것이다.
계림 고목 005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7,300㎡이다. 물푸레나무·홰나무·휘추리나무·단풍나무 등의 고목이 울창하며,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의 시조 김알 지(金閼智)의 탄강(誕降) 전설이 있는 숲이다. 《삼국유사》에 '60년(탈해왕 4)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궤에서 나 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라 이름하였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계림이라는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다는 데서 연유되었으며, 후에 국명으로도 쓰였다. 신라의 신성한 숲이라 하여 현재까 지 보존되어 오며, 100여 주의 고목과 l803년에 세운 비가 있다.
005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길이 18.8m, 홍예(紅霓) 높이 4.97m, 너비 5.94m이다. 남북으 로 길게 조영하고, 출입구는 남쪽에 있는데 너비 2.01m, 높이 1.78m이다. 여기에서 계단을 따라 실내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빙실의 밑면도 외부의 형태와 같은 직사각형으로 입구에서 안 으로 들어갈수록 밑바닥은 경사져 있으며, 바닥 중앙에 배수구 가 있어 내부의 물이 이 경사를 따라 외부로 배출된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5개의 홍예를 틀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에 길쭉한 네모 돌을 얹어 천장을 삼았다. 벽은 직사각형의 작은 석재로 정연하게 쌓아올렸고, 밑부분은 장대석을 연결하 여 지대석(址臺石)을 삼아 견실하게 축조하였다. 천장에는 3곳에 환기 구멍을 마련하여 외기와 통하게 하였는데 , 조각한 돌로 구멍을 덮어 비와 이슬을 막고 있어 다른 석빙고 와는 달리 정연한 양식과 축조를 보여 주목을 끈다. 환기 구멍은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시설하였는데, 이것은 입구가 남쪽에 있으므로 안으로 내려가는 층계가 몇 단 있어서 그만큼 자리[房]를 차지하고 얼음창고의 주실(主室)은 좀더 깊 이 들어간 내부의 북쪽에 있는 까닭이다. 석빙고 옆에는 석비가 있어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데,‘崇禎紀元 後再戊午’는 1738년(영조 14)에 해당하고, 다시 입구의 미석(楣 石)에 ‘崇禎紀元後再辛酉移基改築’이라 새겨져 있어, 축조한 지 4년 만에 현위치에 옮겨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압지 안압지 조감도 00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74년(문무왕 14)에 '궁내(宮內)에 못을 파 고 산(山)을 만들고 화초(花草)를 심고 진기 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 록이 있다. 이것이 안압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못의 이름에 관해서는 초기에 간행(刊行)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동경잡기(東京雜記)>등 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로 미루어 안압지란 이름은 조선시대 초기에 와서 폐허(廢墟)가 되어버 린 신라의 옛 터전에 화려했던 궁궐은 간 곳이 없고 쓸쓸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못 위에 안압(雁鴨)들만노닐고있어 이곳을찾는 이들에의해 서붙여진이름으로 추측된다. 문무왕 19년에는 못 서편에 동궁(東宮)이 건립되었다는데, 임해전(臨海 殿)은 아마도 정전 (正殿)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안압지는 동궁 에 속해 있던 못인 것이다. 이 곳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 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 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얻어진 자료를 토대로 정비한 것이다. 이 곳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5년 3월부터 1976년 12월말까지 2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못의 둘레는 호암석(護岩石)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는데 서암(西 岩)과 남암 (南岩)은 직선으로, 북암(北岩)과 동암(東岩)은 곡선으로 되어 있었다.
005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 찰(石窟寺刹).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 암석굴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국사(佛國寺)를 중창(重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 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 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 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 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 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 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 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005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 찰(石窟寺刹).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 암석굴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국사(佛國寺)를 중창(重 )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 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 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史 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 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 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 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 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005 명승 및 사적 제 1호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의 하나로 그 경내는 사적 및 명승 제 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 에등록되었다.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로 여기에 보면 528년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 하였고, 670년에 는 무설전으로 새로 지어 <화엄경>을 강설하엿고, 그 후 751년에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 들었다고 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테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가 행방불명 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15 광복 후인 199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 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만 남아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복원 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 자하문 이 새롭게 단장 되었다.
005 다보탑-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불국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0.4m, 기단 폭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 서쪽의 석가탑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전형적인 쌍탑가람의 배치이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기단부에는 사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고, 보계에는 난간을 가설하였던 석주가 남아 있다. 그 위에는 네 모퉁이와 중앙에 사각 석주(石柱)를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고 있다. 또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사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죽절형(竹節形) 석주를 돌려 8각 연화석(蓮花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 위에는 8개의 주두(柱頭) 모양의 받침으로 옥개석(屋蓋石)을 받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8각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다. 한국의 석탑 중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형태를 가진 예로,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걸작은 그 유례가 없다. 건립연대는 서쪽의 석가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김대성(金大城)이 중창한 당시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005 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 석탑.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8.2m로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두 탑을 현재와 같이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法華經)》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이 탑은 탑주(塔周)에 연화(蓮花)무늬를 새긴 8개의 둥근 돌을 돌려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이다. 기단은 2층을 이루고 상하에서 탱주(撑柱) 2주(柱)로 알맞게 면석(面石)을 구분하였다. 제1탑신 이상은 탑신과 옥개(屋蓋)를 각각 1석(石)으로 쌓아올렸는데, 기단의 높이와 탑신이 서로 상하에서 알맞게 조화되어 안정된 느낌과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준다. 이 탑은 1966년 해체·복원공사를 하던 중 제2층 탑신 중앙부 사리공에서 금강사리함(金剛舍利函)과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8세기 초엽 목판(木板)으로 인쇄된 다라니경문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임이 밝혀졌다.
005 사적 제 1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 1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헌강왕 때 이 포석정에 대한 기록이 처음 쓰여졌으나, 언제 만들 어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이궁원 내에 유연을 위한 자리로 만든 이 석구는, 유상곡수라는 시회를 벌일 수 있도록 특이한 구조로 만들었다. 원래 뒷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 하나 없어졌고, 이 물을 받는 원형 석조가 있어, 이곳에는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선이 타원 모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배수구의 마무리가 분명하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선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석구는 중국 동진 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대게 자연의 산수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완전히 인공적인 점이 그 특색이다.
005 사적 제20호. 지정면적 1만 4165m2. 능의 외형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지름 36.3 m, 높이 8.7m이다. 밑둘레를 따라 비교적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의 보호석으로 드문드문 놓았으며, 능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경내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비신(碑身) 없는 태종무열 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의 몸통을 받쳤던 귀부(龜趺)와 위를 장식하였던 이수(螭首)가 있다. 이 이수의 전면 중앙부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라 새겨져 있어, 이 무덤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