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N D
탑의 의미 탑은 탑파(塔婆)를 줄인 말로 원래는 범어(梵語 ; Sanskrit)의 'Stupa' 또는 파리어(巴梨語; Pali)의 '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탑파는 불교가 발생하기 전부터 고대 인도에서 '무덤'의 뜻으로, 즉 사람이 죽고나면 화장(火葬)을 한 후 흙과 돌로 돔(Dome)과 원분(圓墳)을 만든 것을 가리켰다. 이러한 탑파는 불교발생과 더불어 교주인 석가모니가 입멸(入滅, 涅槃)하자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당시의 사회 장속(葬俗)에 따라 다비(茶毘 ; 火葬)하였고, 다비 후 그 유골인 사리(舍利)를 봉안하면서 불교적인 조형물이 되었다.
성격에 따라 불탑(佛塔) 승탑(僧塔) 재료에 따라 목조탑 전조탑 모전석조탑 석조탑 금동탑 탑의 종류
고구려의 탑 고구려의 탑으로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영탑사에 8각7층석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평양 청암리 금강사지, 대동군 상오리사지 등에는 8각의 목탑지가 남아 있는 점으로 볼 때 주로 평면 8각의 탑들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고구려의 양식은 이후 이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에 계승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는 평양 영명사8각5층석탑, 대동 광법사8각5층석탑, 대동 율리사지8각5층석탑, 평창 월정사8각9층석탑, 김제 금산사6각다층석탑(이상 고려)이 있으며, 묘향산 보현사8각13층석탑, 남양주 수종사8각5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이상 조선)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제의 탑 백제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건립되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없고, 부여 군수리사지, 부여 금강사지, 익산 제석사지 등에 탑지만이 남아 있는데, 평면 방형인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백제탑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이 탑을 보완하여 백제식의 석탑양식을 완성한 정림사지석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탑들은 목탑의 각 부재에서의 여러 양식을 목재 대신에 석재로서 충실히 구현한 석탑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기단이 얕은 단층기단이고, 옥개석의 폭은 비교적 얇고 넓으며, 네 귀에서 반전하고, 내림마루를 각출했다.
통일신라의 탑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우리나라 석탑은 하나의 형식으로 집약·정돈되는데 이러한 양식의 가장 시원적인 석탑은 감은사지3층석탑(682년)과 고선사지 3층석탑(686년 이전)으로, 이 탑의 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탑의 특징으로는 기단이 2층(상층기단이 높음)이며, 갑석과 옥개석의 상면에는 2단의 각형 괴임을 두었다. 기단부 상·하층의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세웠고, 탑신부의 옥신석 양쪽에도 우주를 세웠다. 옥개석은 폭이 줄어들었고, 하면에는5개의 층단이 있으나 상면인 낙수면은 층단이 없이 경사를 이룬다.
고려의 탑 고려시대에도 불교는 국교로서 숭상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고, 이에 따라 조탑활동도 매우 활발하였는데 당시의 탑들은 대부분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일부지역에서는 전형양식에서 벗어나 고구려와 백제탑의 양식을 계승하는 석탑도 많이 세워졌고, 4사자3층석탑과 같은 이형석탑과 전탑을 계승하는 석탑도 건립되고 있다. 신라의 석탑양식을 계승하였으나 부분적인 변화가 있는 고려시대 석탑의 일반적인 특징은 탑신부의 각 부재가 폭에 비하여 높아져서 전체적으로 고준해지며, 옥신 밑에는 별석이 삽입되기도 한다.
조선의 탑 조선시대에는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불교에서의 예배대상도 불상이 안치된 불당중심으로 변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탑파의 건립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조탑활동이 쇠퇴하였다. 다만 전대의 탑을 모방한 원각사지 10층석탑(1467년, 경천사탑 모방), 함양 벽송사3층석탑(1520년, 신라전형양식 계승), 양양 낙산사 7층석탑(15세기 중엽),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1472), 여주 수종사8각5층석탑(1493년) 등이 세워졌다. 그리고 조선후기의 것으로 법주사 팔상전(1605년)과 쌍봉사 대웅전(17세기)이 남아있는데, 목탑양식의 예를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