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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eur François Clavairoly , Paris Saint-Esprit. ( Eglise réformée de France). Septembre 2010. Matthieu 16, 24-27 . 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마태복음 16 장 24-27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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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eur François Clavairoly,Paris Saint-Esprit (Egliseréformée de France) Septembre 2010
Matthieu 16, 24-27 주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마태복음 16장 24-27절
Chers frères et sœurs en Christ,-Tout d’abord, je tenais vous exprimer un immense merci de me donner la parole parmi vous aujourd’hui !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선, 오늘 여러 분들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커다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C’est un grand honneur et un plaisir de prêcher devant vous tous réunis ce matin. 오늘 아침, 이렇게 함께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됨은 큰 영광과 기쁨 입니다.
-Ensuite, je vous prie de recevoir ici les plus fraternelles salutations et les messages les plus cordiaux des membres de l’Eglise réformée de France et de la paroisse du Saint-Esprit à Paris qui sont en communion avec vous. 또한 저는 이 자리를 빌어 프랑스의 총 개혁 교단을 대표하여, 그리고 파리 선한 장로교회와 함께 교제하는St. Esprit교회를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진정한 우의와 인사를 표하는 입니다.
Que chacun discerne dans ce partage un signe de l’universalité de l’Eglise, par delà les différences de chacune de nos histoires particulières et par delà la distance géographique et culturelle : en Christ nous voici tous frères et sœurs, et fils et filles du même Père. 또한 저희와 여러분은 각자의 특수한 역사적 차이를 넘고, 지리적,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이와 같은 나눔을 가짐으로 교회의 보편성, 즉 공회의 사인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며, 한 아버지를 모신 아들과 딸들인 것입니다.
« Il ne s’agit pas de « sauver » sa vie …mais de la trouver ! » «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찿는 것이다 ! »
J’aimerais porter mon attention sur ces mots de Jésus adressés aux disciples 저는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 말씀에 관심을 집중하고자 합니다.
« Si quelqu’un veut venir à ma suite, qu’il se renie lui-même, qu’il porte sa croix, et qu’il me suive », et puis « Celui qui veut sauver sa vie la perdra ; mais qui perd sa vie à cause de moi, la trouvera. »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그리고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Je voudrais m’arrêter en particulier sur le sens général de cet appel fameux du maître : « qu’il me suive ! ». 저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유명한 부르심의 구절 중 특히 « 나를 따를 것이니라 »
Nous essayons tous tant bien que mal, en effet, de marcher à lui suite du Christ.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따라 가기 위해서 이런 저런 노력합니다.
Un peu comme les disciples de notre récit, qui ne comprennent pas tout ce que demande leur maître mais qui pressentent qu’il y a là, dans cet appel à le « suivre », quelque chose d’essentiel pour nos vies. 우리는 오늘 말씀의 제자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 속에서 인생을 위한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Et nous discernons que cette « suivance » donnera réellement sens à leur vie. 그리고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그들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Marcher à la suite du Christ peut évidemment se décliner de mille manière dans la vie des hommes et dans leur histoire, et chaque chrétien, depuis les premiers temps de l’Eglise jusqu’aujourd’hui, a tenté à sa façon d’expérimenter le mieux possible cette marche, dans la fidélité et la persévérance, selon ses moyens et ses forces, et dans les circonstances si diverses des temps et des lieux. 그리스도를 따라 걷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표현 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실함과 와 인내를 가지고, 그들 각자의 방식과 각자의 능력을 따라서, 매우 다양한 시간과 장소라는 환경 속에서, 가능한 한 잘 이 길을 따라 가는 일을 이루고자 다양한 시도를 해 왔습니다.
Mais j’aime à penser qu’il y a au fond deux manières générales et typiques de vivre cette marche, deux façons de « perdre sa vie pour la sauver » ! 그러나, 저는 이 시간에 «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의 두 가지 방식, 즉 일반적이고 특별한 이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L’une est faite principalement d’ascèse ; et les mots qui qualifient cette marche, cette « suivance » résonnent durement à nos oreilles, comme un écho de la parole du Christ : « porter sa croix, se renier soi-même… » : 첫째 방식은 주로 금욕주의적인 방식입니다. 이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 특히 « 뒤따름 »이라는 단어는 «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 라는 주님의 말씀이 메아리처럼 강하게 우리 귀에 들려지도록 만듭니다.
Il s’agit du mot renoncement, du renoncement à tout ce que peut proposer la vie comme jouissances vaines et éphémères et comme possessions trompeuses et futiles. 이 « 뒤따름 »을 지칭하는 여러 단어들을 보면, 먼저 « 단념 (포기)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헛되고 하찮은 소유욕들, 헛된 쾌락, 일시적인 향락과 같은 것들에 대한 전적인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Il s’agit du mot dénigrement, dénigrement du monde à cause de ses pièges mortels, de ses tentations qui font tomber les plus solides des hommes, à cause aussi de tout ce qui tire la personne vers le bas et la défigure au lieu de l’ élever. 그 다음으로는 « 비난»입니다. 이 비난은 치명적인 올가미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며, 사람을 세우기 보다는 왜곡하고 저 밑으로 잡아당겨서, 가장 강한 사람들까지도 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Il s’agit du mot refus, du refus des plaisirs qui font si facilement dériver les esprits loin de l’essentiel. 또한, « 거절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주 쉽게 거절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 정신을 본질적인 것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Il s’agit du mot évitement, l’évitement de tout engagement dans le réel de la vie et du politique, qui est traversé tout entier par l’orgueil et la violence. 그리고 « 도피) »이라는 단어입니다. 교만과 폭력이 가로지르는 정치와 삶의 현실 속에서의 모든 의무에 대해 피하는 것입니다.
Il s’agit là finalement d’une forme de retrait du monde, de « sage » retrait à l’image de ces retraites spirituelles de quelques jours vécues en des lieux isolés et qui ont quelque succès ici et là, 마지막으로 « 세상에서 떠나 은둔하는» 형태입니다. 고독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몇 일 간의 영적 은둔의 모습은 « 현자 »의 운둔이되며, 여기 저기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et, si nous poussions le raisonnement à l’extrême, il s’agit aussi d’austérité, de pauvreté, où finalement, l’accomplissement de soi se réalise dans la solitude, dans l’isolement, dans la prière, accomplissement dont la figure ecclésiale est portée, très tôt dans l’histoire chrétienne, par le monachisme.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열거한 단어들로만 생각한다면, 주님을 따른 다는 것은 고행과 청빈이며, 결국 이곳에서 경험하게 되는 고독과 고립과 기도를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는 것만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아 성취의 교회적 모습이 바로 기독교 역사 초기에 나타났던 수도원운동인 것입니다.
On peut penser peut-être aussi à ce que d’autres sagesses ont prôné, comme celle de Bouddha, avec la recherche austère et difficile de l’extinction du désir pour enfin trouver le bonheur… 이와 같은 방식은 아마도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인생의 욕망을 끊어 버리고, 고행과 어려움을 찾아야 한다는 석가모니와 같은 현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Dans cette perspective, ce qui fonde la démarche et ce qui anime la marche à la suite du Christ, est bien cette certitude que le royaume n’est pas encore là, qu’il n’est, en tout cas, pas de ce monde ! 이런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태도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태도입니다.
Et que dans ce « pas encore » se nourrit et se joue une attente faite d’évitement et de prise de distance prudente, en une posture religieuse de disciple qui juge et qui se tient comme en surplomb du monde. 이렇게 «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가 임하지 않았다고 하는 태도는, 그들에게 세상을 피하고, 세상과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도록 만들며, 또한 세상을 판단하고 세상과 격리되어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는 수도자로서의 입장을 취하게 합니다.
2°) L’autre manière de comprendre l’appel à suivre Jésus peut se trouver qualifiée par le terme d’acceptation. 예수님을 따르는 부르심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 받아들임 »이라는 용어를 통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Car il s’agit, ici, non seulement de consentir au monde et à ses réalités, mais bien d’accepter la vie telle qu’elle est promise et offerte, et d’accepter ce monde pleinement. 여기에서 « 받아들임 »이란, 단지 세상과 현실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고 약속 된 삶, 그 자체를 받아드리고 그리고 이 세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De l’accepter comme le seul lieu possible, comme le lieu par excellence de l’épanouissement de la vie. 오직 실현 가능한 장소가 이 곳뿐인 것처럼, 마치 삶의 희망이 특별히 이 곳에서만 이루어 지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Il s’agit aussi de reconnaissance, reconnaissance envers la grâce merveilleuse offerte à chacun, dans un parcours humain unique et de grand prix fait de bonheur et de malheur, de joies et de détresses, mais un parcours toujours ouvert sur cette terre. 그 다음은 « 감사 »라는 단어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이루 말 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하여, 유일한 인간의 여정 속의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슬픔 등에 치른 큰 대가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Il s’agit de témoignage, d’action et d’ouverture aux autres, il s’agit d’audace, en tout cas celle qui consiste à intervenir dans les affaires de ce temps, à interpeller ceux qui gouvernent, à s’indigner devant l’injustice, à interférer dans le cours des choses et du monde. 그 다음은 « 증언 »에 관한 것입니다. 이웃에 대해 열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는 이 증언을 위해서는 오직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에 문제에 개입해야 되는 경우, 관리자들의 문제에 질의하는 경우, 불의 앞에서 분노하는 경우, 세상과 어떤 일들의 법정에 서서 그 문제에 개입하고 간섭해야 하는 경우에는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L’acceptation est ici de l’ordre de l’engagement. 여기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적극)참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Dans cette perspective, ce qui fonde la démarche et qui anime la marche à la suite du Christ est cette certitude que le royaume, sans être pleinement réalisé, est pourtant déjà la au travers de quelques signes prometteurs et visibles. 이런 관점에서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작정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몇 가지 보여지고 약속된 사인들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이 곳에 있다는 확실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Et dans ce « déjà là » se nourrit et se déploie la possibilité d’un faire et d’un témoignage qui se risquent dans le monde, avec le risque réel et conscient de se perdre. 그리하여 « 이미 이 곳에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 »를 따르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실제적 위험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 증인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증언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Il est clair que ces deux manières, ces deux types de vivre la « suivance » du Christ sont ici décrits en termes très généraux, et il faudrait sans doute, à cet égard, affiner le discours, et montrer les nuances, les possibles complémentarités.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 따라가는» 삶의 이 두 가지 방식은 여기에서 물론 아주 일반적인 용어로 묘사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나위 없이 이 관점에서 보충될 수 있는 것으로 문장을 더 다듬고 미묘한 차이가 더 보이도록 해 보아야 합니다.
Il est clair aussi que ces deux types de « suivance » recouvrent mille façons d’être disciple. 분명한 것은 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suivance »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수 많은 방법들을 제시해 준다는 것입니다.
Et peut-être même que dans une vie de disciple il arrive qu’on passe d’un type de démarche à un autre 또한 제자의 삶 속에서 위의 선택한 한 방식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길을 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Toujours est-il que le choix de l’ascèse ou du renoncement (pas d’alcool, pas de tabac, une hygiène de vie stricte, une morale d’abstinence, etc.), comme celui de l’acceptation de la vie dans sa plénitude et du témoignage dans le monde, ont à recevoir encore des mots de Jésus une interpellation prompte et vive, et c’est ici que je voudrais en arriver pour finir :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 즉 금욕과 포기(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철저한 금욕과 도덕적 절제의 삶)을 사는 방식을 택한 사람들은, 풍성한 삶을 받아들이고 세상에서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항상 신속하고 강한 주님의 부르심의 말씀을 받아 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림으로 말씀을 끝내려고 합니다.
Si, en effet, l’ascèse et le renoncement sont compris comme une obéissance aux propos du Christ qui demande de « prendre sa croix, de se renier, et de perdre sa vie pour la sauver », dans le sens où serait délivrée dans ces quelques mots une recette, certes bien amère, pour acquérir le salut, 만일, 금욕과 포기가 «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고 요구하시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이해된다면,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이 몇 가지 단어들이 어떤 요리법처럼 주어 진다면, 그것은 참 씁쓸한 일입니다.
s’il s’agit d’accomplir ainsi quelques gestes qui coûtent, s’il s’agit de se conformer à un certain nombre de règles, de convictions et de pratiques contraignantes dans l’idée d’une récompense acquise, enfin, dans l’au-delà, alors cette ascèse et ce renoncement demeurent dans le registre de la Loi et des œuvres qui justifient et ne sont ni évangéliques ni inscrites dans la « suivance » authentique du Christ. 또한, 만일 다음 세상에서 약속된 상급이 있다는 생각 아래 고통이 따르는 몇몇 행동들을 실천하고, 또 두려움을 동반한 행동과 확신으로 몇 가지 규정들을 따른다면, 그때에 이 금욕과 이 포기는 율법이 되고, 의롭게 되는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suivance>가 아니며, 복음적인 것도 아닙니다.
Ils ne sont qu’attitudes hypocrites et intéressées, et « postures religieuses bigotes » dans le pire sens du terme. 그것들은 단지 위선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태도이며, 더 안 좋게 표현하자면 « 편협한 신앙심의 자세들 »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De même, l’engagement et le témoignage dans le monde et tous les plans d’évangélisation élaborés par nos meilleurs stratèges missionnaires, même les mieux intentionnées qui soient, s’ils sont compris par ceux qui les vivent en vue d’une performance quantifiable (croissance du nombre et du chiffre d’affaire) et d’une reconnaissance (label de qualité), en vue d’une gratification, en vue de l’obtention de quelque décoration ou de quelque brevet de fidélité à recevoir ici et maintenant, dans un déjà là du salut, ne relèvent que des œuvres de la Loi et de l’orgueil humain, et non du témoignage chrétien au sens humble, gratuit et discret qu’exprime le terme si riche de martyre. 게다가, 우리의 사회참여와 세상에서 증인되는 일과 우리의 최고의 선교적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모든 복음전도의 계획들이, 그것이 비록 가장 호의적인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만일에, 그것들이 단지 일의 횟수나 숫자의 증가와 같은 수치화된 기록이나 품질 상품처럼 인정받는 목적으로, 또는 보너스나 특별수당과 같은 만족감을 목적으로, 또는 몇 개의 훈장과 신용증서를 지금 여기서 받는 목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순교적이며, 겸손하며, 거저 주는 순박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교만과 율법의 행위에 집착한 이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C’est que la phrase de Jésus est étonnante, et elle nous mène vers un chemin de foi :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참된 신앙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 Porter sa croix » ne serait-ce pas, comme il l’a fait lui-même, assumer notre vie, toute la vie, et jusqu’au bout, comme étant guidée par la volonté du Père, non par la nôtre ? «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 이것은 마치 주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뜻이 아닌 하늘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이끌렸던 것처럼, 우리의 전 생애,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삶을 그렇게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Se renier soi-même », ne serait-ce pas changer d’opinion sur notre vie, ne serait-ce pas orienter sa vie « autrement » que ce que nous ferions sans lui ? « 자기를 부인하고 », 이것은 주님을 따라 인생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꾸고, 나의 삶의 방향을 « 다르게 » 가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nfin, et surtout « perdre sa vie » non pour la sauver, mais « pour la trouver » : • Ne serait-ce pas là l’essentiel du propos? • Trouver est traduit par le verbe euriscw 마지막으로, « 제 목숨을 잃으면 », 이것은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 을 목숨을 찾기 위하여>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Ne s’agirait-il pas, en effet, de comprendre le salut comme découverte, comme trouvaille soudaine, comme un événement inattendu à vivre, précisément, et non pas comme un objet à acquérir, ou comme un « état supérieur » à obtenir ou pire encore comme un bien à posséder, comme une œuvre méritoire à accomplir, comme une récompense à recevoir en échange d’un certain comportement? 결국, 구원이란, 내가 갖고자 하는 물건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좀 더 높은 « 지고한 경지 »로 나아 가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는 일도 아니고, 일의 성과를 달성하는 일도 아니고, 혹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보상을 받으려는 그런 류도 아닙니다. 구원은 찾아야 하는 것이고, 구원은 의외의 발견물이고, 구원은 기대치 못했던 어떤 사건인 것입니다.
Découvrir la vie, trouver la vie, trouver le sens de notre propre vie, tel est le chemin sur lequel il nous emmène, tel est le chemin où il nous précède, lui, le premier aventurier de Dieu, le premier « trouveur », le premier découvreur de cette vie nouvelle, en terme biblique nous disons : –le premier né de cette nouvelle vie-. 생명을 발견하고, 생명을 찾고, 우리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고,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 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첫 번째 탐험가이시고, 첫 번째 발명가이시고, 이 새로운 생명의 첫 번째 발견자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 새 생명의 맏아들이 되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Par conséquent, pour « trouver » la vie, comme il l’énonce dans ce petit récit biblique, à nous de le suivre. Mais alors librement et sans contrainte, et avec les yeux de la foi. 결론적으로,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목숨을 « 찾기 »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단,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말입니다.
A nous de discerner qui il est, à nous de « voir » en lui « le Fils de l’homme venir comme un roi »… », « déjà là mais pas encore pleinement », « pas encore mais déjà là, pleinement ». • Mt 16, 28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 Mt 16.28) », « 이미 임하셨으나 아직은 온전히 임하시지 않은 », « 아직은 아니나 그러나 이미 온전히 임하신 » 주님을 우리는 « 볼 줄 알아야 » 합니다.
Cette vision là est possible, offerte, c’est à dire gratuite. C’est celle de notre vie, « trouvée en Christ », que nous pouvons alors partager gratuitement avec d’autres que nous, dans le témoignage comme dans le secret de la rencontre et du dialogue, ! אָמֵ 이 통찰력은 가능한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또한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 우리의 삶의 통찰력, 그것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값없이 나눌 수 있고, 다른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