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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의 이해. 대중음악의 정의. 넓은 일반대중이 즐겨 부르는 통속적인 성격을 띤 음악이다 팝뮤직 또는 그냥 팝이라고도 한다 현대사회의 일상적인 배경의 일부분이다 (Adorno, 1989). 대중의식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유행가라고도 하며 통속성을 근거로 하고 있고 , 통념상 순수 음악과는 상대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중음악의 정의 : 두가지 접근법. 대중에 강조를 두는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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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의 정의 • 넓은 일반대중이 즐겨 부르는 통속적인 성격을 띤 음악이다 • 팝뮤직 또는 그냥 팝이라고도 한다 • 현대사회의 일상적인 배경의 일부분이다(Adorno, 1989). • 대중의식을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유행가라고도 하며 통속성을 근거로 하고 있고, 통념상 순수 음악과는 상대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대중음악의 정의 : 두가지 접근법 • 대중에 강조를 두는 정의 : 이는 모든 음악이 대중음악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노래는 누군가에게는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 상업성에 비중을 두는 정의 : 이는 인기가 차트나 라디오 또는 방송 등에 의해 주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 음악의 특징 • 대중가요는 근대사회의 산물 • 음반 매체나 방송매체 등 대중매체를 주 전달매체로 삼고 있으므로 구비 전승되는 예술의 적층성(積層性)을 가지고 있지않음 • 창작자와 작품의 오리지낼리티originality가 비교적 분명 • 대중음악은 대중문화에 속함 •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문화인 동시에 서민문화라는 묘한 성격을 지니고 있음
대중들의 경험과 관심사, 인식과 정서, 욕망 등을 드러내는 서민예술인 동시에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치 경제적 체제와 결합되어 있어 검열과 이데로기의 통제 안에서 작품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는 점 • 따라서 대중가요는 당대 정치체제, 대중과 권력과의 힘의 균형, 대중의 의식이나 생활습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권력과 사회지배 질서의 탄력성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됨
작가의식, 작가세계를 파악해야 하는 고급예술 작품분석과는 달리 서민예술인 대중음악은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수용자가 향유하고싶은 형상물로 제공해주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대중음악연구는 수용자의 의식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 수용자 집단은 시대, 계층, 지역, 세대, 환경, 학력, 성별 등에 따라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어 한 시대에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가 다른 시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감흥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점
한국대중음악의 분류 • 트로트 • 포크 • 록 • 발라드 • 댄스
1920~1950년대 음악 • 1920년대 – 대중가요의 시작 - 대중가요의 뿌리가 되고 있는 유행창가는 개화가사나 애국가 독립가 류의 계몽성을 띠는 창가에서 분화되어 나온 것 - 유행창가의 출현은 일본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이입되는 한 현상 - 유행창가가 음반화되고 상업적으로 유통됨에 따라서 일정한 작품적 경향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것을 바로 우리 대중가요의 첫 시작으로 보고 있다 -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고 최초로 음반화된 작품은 1927년 발표되고 2년 뒤 음반화된 “낙화유수”임 - 일본에서 성악 공부를 한 만큼 가수라기보다는 성악가에 가까웠던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를 보통 한국 대중가요사의 시작으로 봄
1930~1940년대 - 일제시대의 대중가요는 지금 트로트라고 부르는 엔카음악이 그 전형을 이루고 있음 - 크게 트로트와 신민요로 분류 - 트로트는 막 이입된 외래적 대중가요양식이고, 신민요는 민요적 전통을 새로운 외래의 노래문화에 접목시킨 양식의 음악 • 트로트는 주로 이별과 방랑으로 압축되고, 눈물과 탄식이라는 양식적 특성으로 표현 :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울고 넘는 박달재, 눈물 젖은 두만강 • 신민요는 당시 대중들의 전통적인 노래 관습이었던 민요를 적극적으로 계승하면서 여기에 트로트 양식이나 동요 등 새로운 노래 관습을 받아들여 뒤섞은 새로운 대중가요 양식 : 노들 강변, 신 방아타령
1950년대 -전쟁. 분단의 슬픔과 트로트의 재생산 : 이별의 부산정거장, 댄서의 순정 -미국 대중음악의 유입 →대중들의 미국지향성과 계층상승 욕망과도 결합된다. : 슈샤인 보이,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아리랑 맘보, 울릉도 트위스트,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특징 1. 제재의 변화와 트로트의 재생산 (1) 트로트의 유지와 신민요의 쇠퇴 • 해방은 되었지만 일제시대 대중가요 양식의 기본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트로트와 신 민요의 양대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이국적인 색깔이 덧붙여진 작품들이 자리하는 일제시대 대중가요의 판도는 여전히 1940년대 후반은 물론 1950년대까지도 한국 대중가요를 주도하였다. (2) 전쟁. 분단의 슬픔과 트로트의 재생산 • 해방 직후의 새로운 경향으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작품의 출현이다. →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그린 노래가 압도적 • 분단으로 인한 실향과 이별은 당시 대중들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절절한 경험이었고 이러한 대중가요는 매우 절절했으며 실제 그러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력했던 많은 대중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다. • 이러한 노래들은 남한 사회의 반공이데올로기를 저해하지 않는다는 일정한 검열 속에서 생산되었다.
2. 미국문화의 유입과 대중가요의 변화 (1) 미국 대중음악의 유입 • 미국 대중음악의 본격적인 유입은 해방 후에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이루어졌고 미국 팝 음악의 유입도 이로부터 본격화. •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5음계가 주도하던 경향에서 서양 근대음악 7음계로의 본격적인 변화가 드러남 • 이러한 변화는 트로트의 탈피를 의미 → 이러한 노래의 양식적 지향은 결국 서양 장단음계와 기초적인 화성으로 이루어진 대중가요이며, 이는 1960년대의 이른바 이지리스닝의 확실한 정착으로 귀결된다.
2) 과시적 이국취미와 미국 대중음악의 흔적들 • 미국 대중음악과 비슷해지려고 하거나 미국을 연상시키는 요소의 삽입이 기존의 작품 경향과 부조화하게 드러나는 현상은 1950년대만의 독특한 특성이다.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블루스 부기우기, 맘보, 탱고, 차차차 등 춤 음악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양식들이 들어온 것이다. 이 경우에도 역시 적극적 모방이라 할 만큼 그 영향을 과시적으로 드러낸다. 3) 대중의 욕망과 도시의 향락 • 미국 대중가요의 적극적인 유입은 대중의 욕망이 결합된 것이다. 영어 단어의 등장, 미국의 풍경이나 지명의 과시적 사용, 미국 대중음악의 요소의 적극적 사용 등도 역시 이러한 대중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적인 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부유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대중들의 사회심리가 1950년대 대중가요의 미국지향성의 본질이다. 말하자면, 이국 취미적인 가사는 물론 새로운 음악적 경향조차 이 사회, 세계에 대한 특정한 인식, 정서,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 풍요로운 미국의 물질문명과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미국의 군대문화로부터 유입된 미국 대중음악은 향락이나 계층상승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세계 • 1950년대 Rock'N Roll이 등장. • 흑인의 <리듬 앤 블루스>와 미국 남부 시골 백인음악인 <컨트리 앤 웨스턴>이 결합된 음악형태 • 1956년 엘비스 프레슬리 출현 -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역동적인 결합을 이룸 - 전세계적으로 록을 인식시킴 • 그 외에도 50년대 중엽에는 척 베리(Chuck Berry), 리틀 리차드(Little Richard) 등의 로큰롤음악이 쏟아져 나옴
1960년대 음악 1. 1960년대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정착과 성격 • 또 하나의 주도적 양식이 정립되는 시기이다. • 1950년대의 복잡한 양상은 1960년대에 비교적 안정된 모습으로 정돈 • 이국 취향적 경향은 사라지고,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면서도 비교적 안정된 새로운 음악이 자리를 잡음 • 이 새로운 경향은 트로트 양식을 밀쳐내기 시작하는데, <초우>, <보고 싶은 얼굴>, <하숙생> 등의 지금까지 우리 대중가요의 스탠다드 팝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양식의 노래들이다. 이러한 1960년대의 새로운 대중음악 양식을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이라 부른다. • 미국에서 이지리스닝이란 말은 백인 음악의 전통에 있는 백인들에게 가장 쉽게 들리는 평범한 음악을 가리킨다
7음계와 3화음의 기본적인 틀이 대중음악의 주류로 정착하기 시작함 • 1960년대의 이지리스닝을 만들어낸 힘은 일제시대 내내 축적된 서양 근대음악들과 해방 후 갑자기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대중음악에 있음 • 미 8군무대 출신의 창작자와 가수들이 대거 등장 - 현미, 최희준, 패티김, 이금희, 위키리, 유주용, 박형준 등 : 미 8군 무대의 음악 분위기와 경향을 한국 대중들에게 소화 가능한 방식으로 변형시켜 텔레비전의 <쇼쇼쇼>로 옮겨 놓음. 이들에 의해서 적지 않은 번역, 번안곡 들이 인기를 얻게 됨
2. 1960년대 음악 문화 형성의 영향 •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한 1961-2년 경 한국의 음악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제도의 변화가 발생 ①새로운 방송 매체(민방 라디오와 TV)등장과 KBS-TV의 탄생 :1961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동양방송이 개국하고, 1964년 동양방송, 1969년 문화방송이 TV 개국 ② 새로운 음반 포맷-LP 레코드의 등장 ③ 정부는 1962년 "한국연예협회"를 결성 - 향후 대중문화를 관리할 수 있는 단일한 협회로서의 힘을 갖게 됨 • 그 첫 테이프는 손석우가 작사·작곡하고 한명숙이 부른 "노란 샤쓰의 사나이"
3. 1960년대 음악 내용 ①1960년대의 도시에서의 삶은 뭔가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으로 가득차 있고 그것은 장조 이지리스닝의 경쾌한 정서로 드러남 (대표적인 곡: 호반의 벤취-권혜경 노래, 서울의 아가씨-이시스터즈 노래, 꽃집아가씨-윤형주 노래) ②계층상승 욕망의 관련된 곡도 많이 등장 (대표적인 곡: 사람나고 돈 났지-남진 노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김상국 노래) ③1957년 공보처에서 건전가요에 대한 진흥 정책을 편 이래 정부는 계속해서 이러한 건전가요에 대해 의식적인 육성을 해 왔으며 1960년대에는 언론사까지 가세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짐 (대표적인 곡: 육군 김일병-봉봉사중창단 노래, 우리 마을-한명숙 노래)
④도시화와 반대로 서울로 떠난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무기력하게 눈물 흘리며 그리워 하는, 시골에 남아 있는 사람의 비참함이 그려져 있는 곡도 많이 등장 (대표적인 곡: 섬마을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노래, 가슴 아프게-남진 노래) ⑤대중가요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소재가 등장. 1960년대의 특이한 소재인 시골과 고아・기아는 모두 근대화와 도시화의 희망으로부터 밀려난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님 (대표적인 곡: 기러기 아빠- 이미자 노래, 생일 없는 소년-김용만 노래)
4. 트로트의 자리잡음 • 가장 대중적인 양식으로 자리를 잡음 • 전파를 타기 시작한 복고조의 가요가 많아졌고, 다시 엔카조의 가요가 각광을 받게 됨 • 방송에 힘입어 이런 노래들이 레코드의 매출을 증가시켰고 지방으로 확산 •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와 더불어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정착이 두드러지면서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 와 같은 엔카조의 노래들이 대중들에게 폭넓게 접근
세계 • 영국의 침공과 비틀스 혁명이 있었으며,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히피즘으로 대표되는 이상주의적인 청년 반문화 운동이 개화 • 1967년을 전후한 시기에 개인의 창작물인 록음악은 청년의 저항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었고, 록 뮤지션은 대중의 전위가 됨. 그러면서 록의 신화는 완성됨. • 비틀즈 • 64년 4월 4일 그들을 빌보드차트 1-5위를 석권했고,그들의 인기는 전세계로 넓어졌다. 그들은 종래의 팝을 다시금 재해석했고, 새롭게 만들었다.
1970년대 음악 -트로트와 포크의 양대 산맥 • 세 가지 특징 : • 이전까지의 국내 대중가요의 주류였던 트로트의 발전 • 청년문화로 대변되는 포크송 • 록음악의 태동
1) 70년대는 TV스타가 등장한 시기. - 3공화국이 TV보급을 장려한 결과 방송 시대가 처음으로 열렸고, 남진, 나훈아를 두 축으로 한 트로트가 전성기를 누림. • 2) 통기타로 대변되는 포크의 등장 - 트로트로 대표되던 기성 대중가요계의 흐름과 분리된 새로운 경향. -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한국의 포크 음악은 70년대의 억압적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문제의 장르로 자리잡음. 청바지에 긴 장발은 그 시대의 청년문화의 대표였으며, 또한 암울한 시대에 저항하는 의식의 한 상징이였고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볼 수 있음.
-청년문화와 포크송의 등장은 전후(戰後)세대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하는데즉, 일제시대에 대한 경험이 없고, 미국문화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자란 세대가 청소년기에 이르러 형성된 문화가 청년문화였고, 이들은 미국식의 자유와 반항이 담겨있는 포크송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임. 이는 90년대 서태지의 등장으로 대두된 '랩댄스 열풍'이 경제적 풍요로움을 경험하며 자라난 신세대의 등장과 연결되는 것과 비슷함. 하지만 포크송 열풍은 75년 대마초 사건과 함께 크게 수그러들고, 애창곡들은 80년대 중반까지 금지곡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3) 이 시기 록음악은 포크에 비해 열세 - 포크가 급상승하여 대학생과 중고생들을 장악하면서 청년문화를 주도한 것에 비해 록은 그 그늘에 가려 청년문화를 주도할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신중현'이라는 록음악의 대부라고 불리는 거물이 존재했지만, 그의 음악을 제외한 여타의 록음악들은 그렇게 두드러지는 자기 양식의 내용적 특징을 갖지 못하고, 이지리스닝(easy listening ;가장 쉽게 들리는 음악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 트로트와 미국 대중음악의 경향이 함께 가미된 모습을 띠고 있는 60 년대의 가요들이 이에 속한다.) 과 포크의 어중간한 사이에 머물고 있었다.
4)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은 캠퍼스 밴드의 전성시대. - 산울림이 시장 안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움 - 재기 넘치는 기타리스트 김수철이 이끈 작은 거인 두 장의 앨범을 내 놓으며 진지한 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킴 - 각종 가요제 여러 등용문을 통해 대학의 아마추어 음악 청년들은 기약 없는 무명 생활의 통과제의를 생략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음. <그대로 그렇게>의 휘버스, <해야>의 마그마, <그 바닷가>의 벗님들, <그때 그 사람>의 심수봉 <돌고 돌아가는 길>의 노사연, <내가>의 김학래, <J에게>의 이선희 TBC 젊은이의 가요제의 출품 곡 <연>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연 세대 밴드 라이너스 같이 아마추어 교내 밴드로서의 성격을 버리지 않은 팀도 없지 않았지만 이 가요제들을 통해 스타덤으로 쾌속 진군하려는 야심은 곧바로 캠퍼스의 노래 문화를 상업적으로 유도하게 했다.
가장 선연한 주목을 모은 두 팀 - 배철수와 구창모가 각각 보컬 을 맡은 항공대의 밴드 런 웨이(RUN WAY)와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BLACK TETRA) 이들은 1978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제1회 해변가요제에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구름과 나>를 출품하여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 이 두 팀을 주축으로 6인조로 재편성된 송골매는 1982년 <어쩌다 마주친 그대>(구창모 작곡)와 <모두 다 사랑하리>(김수철 작곡)를 터뜨리면서 산울림 이후 주류 시장에서 성공한 첫 번째 밴드가 된다.http://blog.naver.com/zhouyu33/20067377534
70년대의 시대적 배경 1. 한국의 대중음악- 무력했던 과거 • 한국의 대중음악은 우리나라의 전통음악보단 서양의 대중음악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한 대중음악은 대중과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그 존재가 확립되므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 군사 쿠데타에 의하여 집권한 세력들은 끊임없이 자신들 정권의 합법성을 강조하고, 소위 ‘야합’에 의해 탄생한 정권들은 도덕성을 소리 높여 외치기 마련이다. • 대중으로부터 오는 도덕성에 대한 도전 위협으로부터 정권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입증하는 수단으로서, 집권 세력이 찾아낸 가장 손쉬운 타깃은 교육과 문화였다. 정부 차원에서 직접 제어가 가능한 교육제도를 장악한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 결과 한국의 교육은 정치적 이용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 낙후된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는 교육과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화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제제가 필요했다.
한국공연윤리위원회는 문화 생산품의 사전 검열을 위한 정부기관으로서 설립되었다. 사전 검열의 규칙은 문화 생산품의 형태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었는데, 대중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영화와 대중음악이 바로 이 검열제도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 때, 대중음악은 도덕성보다는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 대중음악을 정권 유지 차원에서 규제하려는 의도와, 음악을 통한 저항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군사독재 시절 내내 저항의 방법으로서의 노래활동은 계속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정권의 탄압도 계속되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음악’은 필연적으로 넓은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운동권가요’로 명맥을 유지 할 수 있었고, 이들 저항가요는 어디까지나 ‘비주류’음악이었으며, 대부분의 ‘주류’ 대중가요들은 집권세력과 마찰 없이 존재 할 수 있었다.
2. 청년문화 포크송 • 청년문화의 시대의 개막은 1968년으로 봄 • 1968년은 - 이 시기를 대표하는 대중적인 포크 듀엣 트윈폴리어가 활동을 시작한 해 - 비판적인 포크의 대표주자인 한대수가 활동을 시작한 해 - 신중현이 펄시스터즈를 통해 본격적인 인기를 얻은 시기. • 청년문화란 말은 1970년대 문화의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보편화된 용어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학생들은 포크송이나 청바지, 생맥주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를 진보적 학생운동과 그다지 긴밀한 연관 속에서 생각하지 않았으며, 학생운동의 주체들이나 대학신문사 등 진지한 담론을 주도하고 있던 대학생들 역시 당시 청년문화를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오히려 1970년대 한국에 청년문화와 포크송 바람이 불도록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전후 세대의 등장이라고 보인다. 즉 1970년대 초반은 일제시대의 경험이 없어 일본문화에 대한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은 대신 미국문화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자란 세대가 청소년기에 이른 시기였던 것이다. 이것은 어릴 적부터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미국 대중문화를 받아들여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생활감각과 가치체계, 미적 취향을 지니게 된 세대로의 대중문화 세대교체가 격렬한 문화적 갈등을 수반하며 드러난 현상이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가수 • 윤형주․박상규․이장희․양희은․김민기․조영남․송창식 등 - 이들은 이전의 대중가요 창작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급적 의미의 작가에 가까웠다. 한대수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자작곡가수(singer song writer)의 존재가 이 시기 대중가요에서부터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 특징 : • 내용적으로 솔직하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생활을 표현하고 있으며, 때묻지 않은 순수의 이미지들을 가사에 담고 있다. • 화려하고 많은 악기들을 버리고 어쿠스틱 기타만을 혹은 이의 주도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수의 악기만을 사용하며, 가수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연주 형태를 처음 보여주었다. • 트로트의 기타 연주가 화성보다는 선율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인데 비해, 포크송의 기타는 화성을 중심으로 연주하고 그 위에 노래가 선율을 담당하는 형식적 특징을 가졌다. • 화려한 절정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 이 중에서도 김민기의 노래는 - 대중가요가 가장 즐겨 쓰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 없으며,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할말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파격적이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가사와 음악적 구성의 탄탄함은 1970년대 포크의 최고 수준을 보여주면서 이미 포크송의 대중가요적 한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3. 1970년대 전반기 : 신중현과 록 • 청년문화에서 포크에 비해 록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다. 포크가 급상승하여 대학생과 중고생들을 장악하면서 청년문화를 주도한 것에 비해 록은 어느 정도는 그 그늘에 가려 청년문화를 주도할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다. 미8군 밤무대로터 출발한 록은 대학생들과 이질적이었기 때문에 청년문화의 진원지로 들어가지 못했고 또 당시의 여론 주도층인 지식인들과 가까웠던 대학생 가수들에 비해 여론주도 능력이 떨어졌을 수 있다. • 록의 제1세대인 신중현의 작품은 단지 양식적으로만 참신하고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선율과 화성과 가사에서도 참신하다. • <커피 한잔>,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미인> 등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파격성과 하층에서 대중에게까지 익숙한 어법을 구사하는 방식은 트로트적 요소와 이전 대중가요의 태도와 정서를 참신함으로 이끌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
4. 대마초 사건과 1970년대 후반의 변화 • 1970년대 승승장구하던 포크송과 청년문화의 기세가 급작스럽게 꺾인 것은 1975년의 대마초 사건이다. • 이 시기는 196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의 요구가 한껏 고양된 시기였으며, 이를 막기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으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만들어간 시기이기도 하다. •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급기야는 ‘대마초 사건’으로 당시 최고 인기를 달리던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구속하고 활동을 금지시켰다. 220여 곡의 금지곡 발표와, 음반 사전심의제 도입 그리고 저질 공연과 음반제작을 강력 규제하고 벌칙을 강화하는 등의 가요정화바람으로 가요계는 철퇴를 맞게되었다. • 이것을 계기로 포크는 청년문화적인 반문화적 분위기를 청산하고 기성 대중가요계의 경향과 손잡게 되었다. • 그러나 김민기와 한대수의 노래는 대중가요를 벗어나 민중가요 속에서 재해석되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다. • 이런 분위기에서 방송국과 대중가요계가 고육지책으로 만들어낸 것이 대학가요제였는데, 포크와 록 모두 제1세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포크의 쇠퇴기에 대학가요제로 등장한 서울대 농대 샌드페블즈․항공대 활주로․건국대 옥슨80 등의 캠퍼스 밴드와 산울림의 등장은 아직 충분히 개화하지 못한 록의 새로운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세계 • 비틀즈와 바톤터치 -영국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크림(Cream) 등은 전기기타의 금속음을 강조하고 공격적인 비트의 연주를 굉음과도 같이 증폭시켜 들려주는 하드록을 연주 : 기타를 연주하던 지미 페이지를 주축으로 한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John Paul Jones), 드러머 존 보냄(John Bonham) 등으로 레드 제플린이 탄생되어 헤비메탈의 대표적인 그룹으로 주목받으며 록의 정점을 이루고, 그 후 10여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70년대 초반 제퍼슨 스타쉽(Jefferson Starship),에어로스미스(Aerosmith), 이글스(Eagles) 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지방적인 색채를 갖춘 록(웨스트코스트 록, 이스트코스트 록, 서든 록 등이 있음)도 대두. • 또한 69년 킹크림슨(King Crimson)을 필두로,키보드를 많이 사용하고 클래식, 재즈, 현대음악의 요소를 자유자재로 섭취하며,기존의 단순한 록리듬에 신디사이저 등 새로운 악기를 사용한 '프로그레시브록'이 탄생. • 이들에 반발, 76년 영국에서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가 등장. - 냉소적이고 반상업적인 노래로 일관 • 70년대 록음악은 대체적으로 기타의 파괴적이고 기교적인 연주,그리고 악마적이고 남성적인 면모의 과시와 함께 완벽에 가까운 최고 수준의 연주를 자랑했으며 노래는 허무의 색채를 풍김
1980년대 음악 - 조용필과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 1. 수퍼스타 조용필과 새로운 전성기 • 조용필이 노래한 작품들은 트로트, 이지리스닝, 포크, 록 등의 대중가요사의 주요 양식을 총망라한 작품이었고, 단조 이지리스닝과 록의 화려한 결합을 취하기도하고 ,록에 훨씬 가까운 노래를 만들기도 했으며, 록에 결합시키지 않은 순수한 이지리스닝의 노래들을 부르기도 함. • 전 연령층, 전계층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상품이었으며 철저하게 수용자 취향을 고려하여 다양한 양식의 작품을 생산해내는 대중작가. • ex) <창밖의여자>,<촛불>,<단발머리>,<돌아와요 부산항에> • 조용필의 주류경향을 중심으로 김수철, 송골매, 전영록, 송골매 등이 각각 록 방향과, 댄스뮤직, 발라드 방향의 스펙트럼으로 포진하여 활동. • 이와 함께 록이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데 록은 리듬과 강세가 강하며, 디스토션(distortion)의 특질을 가지고 전반적으로 비자연적 음량의 수준을 갖고 외부로 분출하는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록의 인간형은 비이성적이며 저항적이며, 자기내부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분출하는 질감의 것.
2. 트로트, 댄스뮤직, 발라드의 정립과 발라드의 융성 •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의 대중가요는 팝발라드, 댄스뮤직, 트로트 세 양식으로 정리, 정립. • 발라드는 포크의 이지리스닝적 발전형태라 말할 수 있으며, 댄스뮤직은 록의 이지리스닝적인 발전형태라 할 수 있겠고, 트로트도 계속 불리워졌는데 단조의 비극적 정서가 아닌 즐거운 트로트가 많이 불리워졌다. • ex) 이용<잊혀진계절>, 이선희<J에게>, 박남정<사랑의 불시착>, 주현미<비내리는영동교>
3.언더그라운드의 본격화와 민중가요의 대중 가요권 진출 • 1980년대부터 비로소 언더그라운드의 대중음악인들이 등장하기 시작. • 언더그라운드의 특징 • 반(反)대중매체지향적 • 작가주의적 의식을 강하게 지님 • 사회에 대한 철학적 가치체계를 담고 있음. • 척박한 사회 속에서 ‘순수’를 찾기도 하고, ‘관조적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 또한, 어두운 사회 이면에 대해 본격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 언더그라운드로 자리잡은 포크는 우리사회에 ‘순수’를 기대했으며, 시일이 지나서는 ‘순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관조의태도’로 돌아섬. • 이에 반해 주목할 만한 양식은 록이었는데, 록은 자신의 삶을 세상 전체라고 선언하는 주관주의적 세계인식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포크에서처럼 세상이나 자신의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순수에 대한 기대나 관조적 거리두기를 통한 위안적 극복을 시도하지 않음.
이 시기에 주목할 것은 민중가요 계열인데, 노찾사를 대표로 한 이들 노래는 검열성 심의나 대중가요 시장의 논리로부터 독립적이었고, 수용자 대중들의 사랑타령중심의 획일된 대중가요 취향을 비판했다. 이들은 노래가 사회의 어두움을 극복하고 더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ex) 조동진, 시인과 촌장, 해바라기 <모두가 사랑이예요>, 송창식<참새의 하루>, • 하덕규<한계령>, 신형원<개똥벌레> ⇒ (포크 계열) • ex) 들국화 <그것만이 내세상> ⇒ (록 계열) • ex) 노찾사 <솔아 푸르른 솔아> <사계> <광야에서> ⇒ (민중가요 계열)
80년대 가요사와 현대사적 맥락 • 10.26이후 독재의 막은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신군부에 의한 새로운 독재의 서막이 올랐다. 군부독재에 의한 사회적 억압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끊임없이 분출됐고, 마침내 87년 6월항쟁과 6.29선언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획득함으로써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 전두환의 군부독재는 정권 창출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끊임없는 ‘억압장치’나 ‘억압기구’를 통해 철저하게 반민주화 노선으로 걷게된다. • 특히, 언론, 문화부분에 있어 <보도지침>, <언론기본법>, <언론기관통폐합>으로 대변되는 ‘억압과 통제’ 위주의 정책을 단행함과 동시에 유화책의 일환으로 <3S정책>(Screen, Sports, Sex or Speed)을 병행하였다. <언론기본법>에 따라 설치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는 <보도지침>에 따라 모든 방송과 보도에 있어 ‘사전검열’을 하게된다. 또한 언론인들에 대한 통제와 민주언론인에 대한 해직과 탄압을 자행하며 철저하게 언론과 방송매체를 권력집단의 정당성부각에 이용하거나 권력자를 미화하는데 이용하였다. 또한 <3S정책>의 일환으로 스포츠와 오락 프로그램을 과다하게 편성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언론. 문화정책은 많은 ‘금지곡’을 양산하게 되었고, 특별하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항곡이 아니거나, 정치적 연관성이 없어도 그 내용이 ‘우회적 표현’이라 단정지어서 ‘금지곡’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 앞서서 80낸대 가요사가 조용필이라는 수퍼스타와 ‘트로트와 발라드의 융성의 시대’라고 말한 바 있다. 대중가요가 정서적인 측면에서 집단의식과 감정표출의 매개가 된다는 측면을 살펴볼 때, 80년대 가요사의, ‘발라드’는 ‘이지리스닝’적인 ‘사회유화국면’이나 ‘민주화’를 염원하는 집단무의식의 표현이 될 수 있겠다. 또한 언더그라운드의 본격화와 민중가요의 등장은 ‘군부독재타도’와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중의 분출욕구라 할 수 있겠다.
80년대 후반 대중음악의 주요특징 • 발라드의 강세, 록음악의 대중화, 트로트의 변화, 댄스뮤직의 등장 등 1) 조용필의 영향을 받아 발라드가 주류를 이루었던 가요계의 계보를 이어 변진섭, 이승철, 윤상, 신승훈 과 같이 팝 발라드 스타들이 등장. 2) 록 그룹들을 중심으로 기성의 방송 매체 중심적인 경향을 벗어나서 소규모 콘서트 중심으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생겨남. 1970년대 청년문화의 1980년대적 부활로도 평가될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등장은 '록음악'의 대중화를 가져옴. 이 때부터, 록음악은 일정한 경향성과 내용의 방향성을 지니기 시작하였고, 폭발적인 샤우팅 (괴성을 지르는 듯한 록의 창법)과 직설적인 가사 등으로 그 저항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 대중매체 바깥에서 대학생이나 노동자층을 중심으로 저항적인 노래 문화가 폭넓게 형성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가 1980년대 후반에 대중 음악계에 진출하였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 그 대표적 예. 4) 이 시기 트로트는 이전의 애잔한 정서를 대변하던 전통적인 트로트와 궤를 달리한다. 장조가 가미된 흥겨운 리듬과 기교적인 창법 등을 구사하는 주현미, 현철 등의 등장으로 트로트는 성인들에게 인기를 얻음. 5) 이 시기는 또한, 댄스뮤직이 본격화되는 시기. 댄스뮤직이 본격화될 수 있는 것에는 텔레비전의 보급과 컬러 텔레비전 시대의 개막으로 인한 비디오형 가수의 요구, 여기에 육체적 에너지가 넘치는 10대 수용 층의 대두라는 조건이 맞물려 있음. 댄스뮤직은 록이 지닌 강한 리듬과 표현의 외향성, 육체적 에너지를 계승하되, 익숙하고 달콤한 선율과 결합함으로써, 즐겁게 춤추면서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였지만, 댄스뮤직은 발라드에 비해 아직 주변 부에 머물고 있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댄스뮤직이 대중가요계의 중심에 설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함.
세계 • 비디오 싱어 등장 • 1983년 "Thriller" 앨범의 주인공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명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다양한 모습을 세계에 드러내며 전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4천만장의 판매고를 올림. • 이때부터 음악관계자들은 '벽을 부순다'는 의미의 크로스오버라는 용어를 공공연히 사용하기 시작했다.실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정체이다. 인종의 벽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의 벽, 성의 벽, 국가의 벽을 넘어선다. MTV의 등장으로 비디오형인 싱어가 주무대를 차지하게 되었고, 상업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가 오게 되었고,록 음악에 위기가 온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이후 80년대가 표방하는 팝음악을 대표하면서 현재까지 오랫동안 음악의 신기원을 이루고 있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정점으로 한 하드록 열기가 점차 식어갈 즈음,하드록이 답답하다고 느낀 젊은이들은 80년대초 스트레이트한 요소를 더욱 높이고 강도에서도 날카로운 금속성 톤을 전개하는 헤비메탈 음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하드록에 대한 더 강한 반란이었다. • 80년대 중반 메탈리카가 등장하면서 메탈은 드디어 주류의 위치로 부상했으며 스레시 메탈 (Thrash metal), 데스 메탈(Death metal) 등으로 점차 분화해 나갔다. 딥 퍼플(Deep Purple), 일렉트릭썬(Electric Sun) 이후 80년대에 나타난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은 바로크 메탈을 전세계적으로 알리고 그 유행을 몰고 왔다.
1990년대 음악 ~현재- 서태지와 포스트(POST) 서태지 • 10대 취향 댄스 음악의 시장 장악과 성인층의 노래방 문화로 요약 • 가장 적극적이고 구매력 있는 소비 집단으로 성장한 10대들은 방송가와 음반 시장을 완전히 장악, 성인 가요는 시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됨. • 이런 경향은 특히 노래방이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 성인들은 노래방을 통해 과거의 레퍼토리로 노래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고 음반 시장에서는 거의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게 됨. • 한편, 1995년에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1996년부터 대중가요 사전 심의 제도가 폐지됨으로써 오랜 검열의 역사가 끝나게 됨.
1. 변화되는 흐름 • 1980년대 후반을 주도했던 발라드가 이상우, 김민우를 거쳐 새로운 감각을 지닌 1990년대 풍 발라드는 가수 신승훈, 윤종신, 이승환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이미 변집섭이 등장한 시기처럼 텔레비전을 장악할 주류적 기세는 수그러져 있었고 그 틈에 태진아나 설운도 등의 트로트 가수들의 신곡이 대중가요계의 표면 위에 오랜만에 오름. • 1992년부터는 이전의 발라드의 흐름과는 다른 철이와 미애, 현진영 등의 댄스뮤직이 급부상. •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앨범<난 알아요> 의 열풍은 이제부터 1990년대라는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고, 사회 전체에 신세대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를 만듬. • 언더그라운드에서 공일오비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나와 큰 인기를 모으고 강산에의 첫 음반이 나온 것도 같은 해.
2. 1990년대의 화두, 신세대 • 1990년대 신세대 문화는 1970년대 생, 개인화․분지화된 아파트형 도시생활 속에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성장한 세대의 문화. • 이들은 농촌이나 전원에 대한 체험적 기억이나 그리움이 없고, 도시소음, 기계음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용한 것을 못 견뎌한다. 그들은 유년기 때부터 마이클 잭슨을 보고 햄버거와 콜라를 먹고 자라나, 록음악과 전자악기에 대하여 친밀감을 가지고 있는 세대이다. • 이러한 세대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데, 그들은 1980년대와는 다른 외향으로 등장하여, 다른 음악과 다른 몸짓을 보여주었다. 얌전히 서서 노래하지 않고 이전에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느낌의 춤을 격렬하게 추었고, 음악들은 건조하고 분절적인 질감의 기계 음들로 채워져 있었다. 또한 이들이 입고 나온 헐렁한 바지와 돌려 쓴 모자 등에 10들은 큰 지지를 보냈다. • 이즈음 ‘압구정동 오렌지족’ 같은 못마땅한 10대들의 이야기가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세대들은 1980년대의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를 벗어 던지고, 활달하고 화려하고 빠르고 경쾌하고 가벼운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신세대들의 사유방식과 문화는 단지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한 철없는 어린것들의 버릇없는 투정과 향락과 무질서로 간주되는 관점을 넘어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자신들에게 불필요한 질서를 육체로 깨뜨리고 우스꽝스럽게 무력화하는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3. 댄스뮤직의 새로움과 언더그라운드의 비약 •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의 등장은 발라드 주도를 뒤엎고 댄스뮤직을 1990년대의 주류경향으로 정착. • 이보다 앞서 현진영, 철이와 미애 등이 길을 열었으며 이들 후에는 듀스와 잼, 노이즈, 룰라 등이 1990년대 전반기의 댄스뮤직을 장식. • 이들은 1970년대의 포크에 이르기까지 도달하려고 했던, 서양 근대 백인음악의 기본 문법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음. 이들은 이미 그 수준을 뛰어넘어 미국 흑인음악계 계열과 결합된 여러 대중음악 양식들을 자유자재로 받아들이고 있음. 적어도 이러한 댄스뮤직들은 단지 10대들만이 좋아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상당한 음악적 긴장감을 가진 새롭고 짜임새 있는 음악이었던 것. • 1994, 5년경에 이르면 신세대 대중가요는 최고 전성기에 도달.